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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지야의 종교적 박해—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그루지야의 종교적 박해—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그루지야의 종교적 박해—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흑해의 온화한 해안에서부터 얼음이 덮인 카프카스[코카서스] 산맥에까지 뻗어 있는 그루지야는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울창한 삼림과 급류와 우거진 계곡들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걸쳐 있는 이 산악 지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루지야의 수도인 트빌리시는 현대적인 건물들이 기념비적인 고대 건축물들과 어우러져 있는 북적이는 도시입니다. 하지만 그루지야가 지닌 최고의 자산은 그 나라의 국민들인데, 그들은 강한 가족 유대와 따뜻한 후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루지야 사람들은 역사 전반에 걸쳐 압제를 받았습니다. 이 나라는 로마, 페르시아, 비잔틴, 아랍, 튀르크, 몽골, 러시아 등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습니다. 한 추산에 의하면, 트빌리시는 29번이나 파괴되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루지야 사람들은 삶과 예술과 노래와 춤에 대한 사랑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용적인 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평판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제 더는 그루지야의 국민들 모두가 그러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그루지야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수백 명의 동료 시민들을 공격함으로 이 나라의 평판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사나운 폭도들이 죄없는 남녀와 어린이는 물론, 심지어는 노인들과 장애인들까지 구타하였습니다. 공격자들은 못이 박힌 몽둥이와 쇠막대기를 휘둘러 피해자들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얼굴과 머리를 찢어 놓았습니다. 해로운 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은 그루지야의 시민들이 이처럼 악의에 찬 구타를 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인 여호와의 증인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은 대부분의 공격자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루지야에 존재해 왔습니다.

비난에서 공격으로

그루지야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도,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은 압수되기 일쑤였습니다. 1999년 4월에 세관 당국은, 그루지야 정교회의 수장인 총주교의 허가가 있어야만 압수한 서적을 내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 다음 달에도 정교회가 또 다시 거론되었는데, 이번에는 그루지야의 이사니-삼고리 지방 법원에서였습니다. 그 법원에서, 국회 의원이자 “그루지야 만세!”라는 정치 운동의 지도자인 구람 샤라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법인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증인들이 반국가적이고 위험한 자들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샤라제의 주장을 지지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소송 서류에는 그루지야 총주교의 서기가 보낸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1999년 5월 20일에, 그루지야는 인권과 기본 자유의 보호를 위한 유럽 조약을 채택하여, 그 조약의 조항들을 준수하겠다고 약정하였습니다. 그 조약의 제10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인은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그러한 권리에는 의견을 고수할 자유와, 공공 기관의 간섭 없이 국경을 초월하여 정보나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알릴 수 있는 자유가 포함된다.” 증인의 반대자들은 그와 같은 권리를 인정하고 증인들의 종교 서적을 금지시키려는 노력을 중단하였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99년 6월 21일에, 그루지야 총주교 집무실은 세관 검사국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외국의 종교 서적을 배포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루지야 정교회의 공식 대변인인 기오르기 안드리아제는 한술 더 떠서, 여호와의 증인은 위험한 집단이며 그들에 대한 금지령을 내려야 한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서적을 불태웠던 광신자들은 이제 증인들을 직접 공격해도 처벌을 받지 않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1999년 10월 17일 일요일에 그들은 다시 한 번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난동을 부린 폭도들이 처벌을 받지 않다

일요일이던 그날에, 트빌리시의 여호와의 증인들 중 약 120명—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이 종교 모임에 참석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교회 사제였다가 성직을 박탈당한 바실리 므칼라비시빌리와 그의 추종자들 200명이 모임 장소에 난입하였습니다. * 그들은 증인들을 둘러싸고 포위한 다음 나무 몽둥이와 쇠 십자가로 증인들을 반복적으로 구타하였습니다. 4명의 공격자들은 증인 한 사람의 팔과 목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그의 머리를 홱 잡아당겨 고개를 숙이게 한 다음 머리를 밀기 시작하였으며, 폭도들은 그처럼 굴욕적인 일을 고소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습니다. 광포한 폭도들이 마침내 자리를 떠났을 때, 증인들 중 16명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 남자는 갈빗대가 세 대나 부러졌습니다. 40세 된 여성인 파티라는 증인은 후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그들이 내게 고함을 치기 시작하더니, 그 중 한 사람이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때렸어요. 내 얼굴의 눈 부위를 때렸지요.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려 보려고 애썼어요.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어요.” 이 잔인한 폭도가 파티를 구타하는 것을 그만두었을 때, 파티는 왼쪽 눈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 당한 구타 때문에 파티의 눈은 지금까지도 손상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난폭한 공격 장면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자,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였습니다. 다음날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본인은 이번 일을 단죄하며 법 집행 기구가 형사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디오 필름을 통해 폭도의 주동자와 다른 공격자들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유죄를 입증하기란 아주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2년이 지났건만 그 공격자들 중에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처벌이 없자 폭도들이 대담해지다

세속 당국과 교회 당국 모두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자들이 폭력이 용인될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처벌이 없자 더 대담해진 폭도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개인 집과 거리와 숭배 장소에서 약탈하고 구타하고 발로 차는 난폭한 행위를 더 많이 자행하였습니다. 1999년 10월부터 2001년 8월 사이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은 증거 서류가 있는 경우만 해도 80건이 넘었고 1000명이 넘는 피해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2월 9일에 트빌리시 시의 한 검사는 기자들에게 바실리 므칼라비시빌리에 대한 수사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집필하는 현재까지도, 그루지야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의 반대자들이 증오에 찬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여전히 방치하고 있습니다.—“폭도의 공격이 계속되다” 네모 참조.

경찰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뉴스 보도들과 촬영된 비디오를 보면, 경찰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을 방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공격에 가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2000년 9월 8일에 주그디디 시에서는 일단의 경찰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여호와의 증인 700명이 모인 평화로운 대회를 해산시켰습니다. 목격 증인들은, 복면을 쓴 경찰관들이 50명도 더 되는 증인들을 구타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쓰러뜨렸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대회장의 소유주는, 대전차용 공포탄이 어린아이들의 머리 위에서 터졌을 때 그들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던 겁에 질린 표정을 회상하면서, “정말 가슴이 아프더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대회장에 난입해서는 그곳을 완전히 태워 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비열한 사건이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었기 때문에(“경찰이 폭력 행위에 가담하다” 네모 참조), 2001년 5월 7일에 국제 연합 고문 대책 위원회가 “그루지야에서 법 집행관들이 고문 행위 및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대우와 처벌을 계속해서 자행하고 있는 것과, 고문을 당했다는 수없이 많은 주장이 있는데도 그러한 주장이 있을 때마다 신속하고 공정하고 온전한 수사를 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것도 당연합니다. * 사실 여호와의 증인은 경찰에 400건도 넘는 고소장을 제출하였지만, 신분이 이미 알려져 있는 가해자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국회에서 선출된 그루지야의 국선 변호인 겸 옴부즈맨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습니다. “직책상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당사자들이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인권은 문서상의 이론에 불과하다.”

대법원의 판결이 혼란을 야기하다

폭도와 경찰의 불법적인 공격으로는 모자라기라도 한 듯이, 최근에 그루지야의 대법원은 여호와의 증인의 권리에 대해 혼란을 야기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판결이 내려지게 된 배경을 잠시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치가인 구람 샤라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법인체들을 해산시키려고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의 소송은 2000년 2월 29일에 기각되었습니다. 하지만 샤라제는 상소하여 승소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대법원에 상소하였습니다. 2001년 2월 22일에 대법원은, 기본적으로 엄밀한 법 해석에 따른 것이라며, 증인들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헌법에서 명시하는 바에 따르면 종교는 종교 단체의 등록에 대한 세부 사항을 다루는 법에 따라 공법에 의거하여 등록되어야 한다고 대법원은 판단하였는데, 종교 단체의 등록에 관한 그러한 법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대법원은 그러한 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은 다른 어떠한 방식으로도 등록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루지야에는 종교 활동을 지원하는 약 15개의 다른 단체들이 합법적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그루지야의 법무부 장관인 미헤일 사카시빌리는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 판결은 참으로 미심쩍은 것이다. 그 판결은 대법원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루지야 국회 법사 위원회의 의장 대리인 주라브 아데이시빌리는, 그 판결은 “우리 교회[그루지야 정교회]에 속해 있는 극단적인 사람들이 소수 종교 집단들을 억압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에 그 판결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다고, 케스턴 통신사에게 말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데이시빌리가 우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판결이 있고 나서 며칠 뒤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폭력이 재개되었습니다. 2001년 중에, 증인들은 2월 27일, 3월 5일, 3월 6일, 3월 27일, 4월 1일, 4월 7일, 4월 29일, 4월 30일, 5월 7일, 5월 20일, 6월 8일, 6월 17일, 7월 11일, 8월 12일, 9월 28일, 9월 30일에 폭도와 경찰과 정교회 사제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공격은 거듭거듭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박해의 물결이 새롭게 일어나자, 대법원은 자신들이 내린 판결의 의미를 공개적으로 명확히 밝히는 이례적인 조처를 취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반 대중은 여호와의 증인 연합체의 등록을 취소한 대법원의 결정을 잘못 해석하였다. ·⁠·⁠· 사법상의 법인체인 피고의 법원 등록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사상과 양심과 종교에 대한 그들의 권리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침범을 당하거나 제한을 받는 것은 아니다. 독자적으로든 타인과 공동으로든, 공개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신앙을 바꿀 수 있는 그들의 자유는 제한을 받지 않는다. ·⁠·⁠· 본 법원의 판결은 사상과 정보를 받아들이고 유포할 수 있는 피고의 권리를 제한한 것이 아니다. 그 판결은 평화로운 집회를 열 수 있는 그들의 권리를 금하지 않는다.”

수많은 그루지야 사람들이 박해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다

이러한 대법원의 성명이 집단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아 보이지만, 수많은 그루지야의 시민들이 현재 자행되고 있는 박해를 이미 단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 보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2001년 1월 8일부터 여호와의 증인은, 폭도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과 그루지야의 시민들에게 가해진 폭력적인 공격에 가담한 사람들을 기소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돌렸습니다. 2주 만에 그루지야의 모든 지역에 있는 13만 3375명의 성인 시민들이 그 탄원서에 서명하였습니다. 그루지야의 여호와의 증인이 1만 5000명밖에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그 탄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그루지야 정교회의 신자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2001년 1월 22일에 그 탄원서가 사라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로 그날, 그루지야의 국선 변호인인 나나 데브다리아니의 집무실에서 탄원서를 정식으로 공개하기 위한 기자 회견이 열렸습니다. 기자 회견이 진행되는 도중 갑자기, 바실리 므칼라비시빌리와 다른 열 사람이 14권으로 된 탄원서를 탈취하려고 집무실에 뛰어들었습니다. 코카서스 평화 및 민주주의 연구소의 한 여성 대표자가 탄원서를 지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침입자들은 그를 공격하였습니다. 므칼라비시빌리가 욕설을 퍼부어 대는 동안, 그의 추종자들은 기자 회견을 주최한 사람들과 몸싸움을 벌여 14권 중 12권을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그 사태를 목격한 외국의 외교관은 흥분하며, “이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2월 6일에 탄원서는 다시 증인들의 손에 넘어왔으며, 2001년 2월 13일에 그루지야의 대통령에게 제출되었습니다.

‘모든 공격 행위는 ·⁠·⁠· 기소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루지야와 세계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루지야의 대통령이 탄원서에 대해 조처를 취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이전에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를 거듭거듭 단죄한 바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9년 10월 18일에 대통령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을 가리켜 “용납할 수 없는 조직적인 집단 학대”라고 묘사하였습니다. 2000년 10월 20일에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의 한 성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루지야 당국이 인권과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면에서 계속 총력을 다할 것임을 귀하에게 보증하는 바입니다.”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2000년 11월 2일에도 유럽 안전 보장 협력 위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문제[그루지야에 있는 소수 종교 집단들이 처한 상황에 관한 문제]는 우리 국가의 국민들과 정부에게도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은 그 위원회에게 다음과 같이 보증하였습니다. “모든 공격 행위와 신체적 폭력은 기소의 대상이 될 것이며 가해자들에게는 법에 따라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유럽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우려의 눈초리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사람들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의 굳은 약속이 머지않아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편, 전 세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루지야의 동료 신자들을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으며, 그루지야의 용감한 증인들은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시 109:3, 4; 잠언 15:29.

[각주]

^ 3항 그루지야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본지 1998년 1월 22일호에 실린 “그루지야—보존된 고대 유산” 기사 참조.

^ 6항 그런데 2001년 중에, 세관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을 압수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 10항 바실리 므칼라비시빌리는 1990년대 중반에 그루지야 정교회(GOC)가 세계 교회 협의회(WCC)에 가입한 것에 대해 그루지야 정교회를 강력히 비난하였다가 그 교회로부터 추방된 인물이다. (그루지야 정교회는 그때 이후로 세계 교회 협의회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므칼라비시빌리는 부주교인 키프리안이 이끄는 그리스 구력파(舊曆派)에 가담하였다.

^ 15항 그루지야는 고문 및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대우나 처벌을 반대하는 국제 연합 협약에 조인한 123개 국가 중 하나이다. 따라서 그루지야는 “고문을 불법화”하기로 약정한 나라이다.

[24면 삽입]

“모든 공격 행위와 신체적 폭력은 기소의 대상이 될 것이며 가해자들에게는 법에 따라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그루지야의 대통령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2000년 11월 2일에 한 발언

[24면 삽입]

“우리는 이 문제[소수 종파에 대한 폭력 문제]가 해결되어 그루지야에 있는 모든 종파들이 억압받는 일 없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는 자유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미국 워싱턴 D.C. 에 있는 그루지야 대사관의 수석 고문인 다비드 숨바제, 2001년 7월 3일에 한 발언

[20면 네모와 삽화]

폭도의 공격이 계속되다

그루지야 당국이 여호와의 증인을 공격한 사람들의 유죄를 입증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인들은 더 많은 박해 행위에 노출되었다.

일례로, 2001년 1월 22일에 트빌리시의 스바네티스 우바니 지역에서, 이전에 정교회 사제였던 바실리 므칼라비시빌리와 그가 이끄는 폭도들은 증인 70명이 모여 있는 종교 모임에 난입하였다. 그들은 증인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나무 십자가와 쇠 십자가로 구타하였다. 폭도들 중 한 사람은 증인의 머리를 커다란 나무 십자가로 어찌나 세게 내리쳤던지 십자가의 가로대가 부러질 정도였다. 일부 증인들은 어두컴컴한 방으로 끌려가 여러 폭도들에게 구타를 당하였다. 연로한 증인들은 폭도들이 두 줄로 늘어선 사이를 뛰어 지나가도록 강요당하였으며, 그렇게 하는 동안 주먹과 십자가로 구타를 당하였다. 두 성인 남자는 14세 된 남자 아이를 뒤쫓아간 다음,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는 그 아이를 주먹으로 구타하고 발길질을 하였다. 30세 된 한 폭도는 12세밖에 안 된 남자 아이를 뒤쫓아가서 그 아이의 머리를 커다란 그루지야어 성서로 세게 내리쳤다. 한편, 한 증인은 경찰을 부르기 위해 그 집을 뛰쳐나갔지만, 붙잡히고 말았다. 폭도들은 그의 입 속이 피로 가득 차 토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마침내 이 무자비한 폭도들은 해산하였다. 공격자들은 아직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므칼라비시빌리의 추종자들은 2001년 4월 30일에도 동일한 여호와의 증인 회중의 종교 모임을 또다시 해산시켰다. 공격자들은 증인들을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간 다음 여러 개의 못이 박힌 막대기로 그들을 구타하였다. 막대기에 박힌 못들 때문에 타마즈라는 증인은 오른팔, 왼손, 왼발, 왼쪽 뺨이 찢어져 벌어졌다. 게다가 타마즈는 머리에도 아주 깊은 상처를 입어서 다섯 바늘을 꿰매야 하였다. 폭도들은 모임이 열리던 집을 약탈하고, 가구와 가전 제품과 모든 유리창을 때려 부수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큰 모닥불을 피워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을 불태워 버렸다. 2001년 6월 7일에 인권 감시소는, 그루지야의 내무부 장관인 카카 타르가마제와 그루지야의 검찰국장인 기아 메파리시빌리에게, 이러한 폭력 행위와 최근에 있었던 다른 공격 행위들을 자행한 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어떤 조처들을 취했는지에 대한 자료를 공식으로 요청하였다. 아직까지 기소된 공격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21면 네모]

경찰이 폭력 행위에 가담하다

2000년 9월 16일에 마르네울리 시의 경찰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타고 있는 19대의 버스가 대회장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였다.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한 곳에서 공격자들은 증인들이 타고 있는 버스들에 돌을 던졌으며, 승객 한 사람이 머리에 돌을 맞았다. 몇몇 증인들은 버스에서 끌려 나가서 구타를 당하였으며, 다른 승객들은 강탈을 당하였다. 한편 경찰은, 대회장을 파괴하기로 작정한 므칼라비시빌리의 추종자들을 가득 실은 버스들은 자유로이 통과시켜 주었다. 폭도들은 1.5톤이나 되는 종교 출판물을 태워 버렸다. 그 자리에 있던 경찰들은 증인들을 구타하는 데 가담하였다.

코카서스 통신사는 내무부 장관이 이 공격에 대해 수사할 것이며 “적절한 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수사관들이 가해자들을 고소할 근거는 충분하다. 그루지야의 헌법 제25조는 누구에게나 공개 집회를 열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증한다. 하지만 공격자들은 단 한 사람도 기소되지 않았다. 이 공격이 있은 지 5개월 후에, 케스턴 통신사는 “그루지야 만세!”라는 정치 운동의 지도자인 구람 샤라제가 마르네울리와 주그디디 당국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개최하는 2개의 대회를 열지 못하게 한 사실을 그의 변호사가 인정하였다고 보도하였다.

[21면 네모]

그루지야의 헌법은 보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아래의 발췌문이 밝혀 주는 것처럼, 1995년 8월 24일에 제정된 그루지야 헌법은 종교의 자유와 잔인한 공격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권리를 보장한다.

제17조—(1) 인간의 명예와 존엄성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 (2) 고문 및 비인간적이거나 잔인하거나 비인격적인 대우와 처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제19조—(1) 모든 개인은 언론, 사상, 양심, 종교, 신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2) 사상, 신념 혹은 종교를 이유로 특정인을 박해하는 것을 금한다.

제24조—(1) 모든 개인은 자유로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유포할 수 있는 권리와, 자신의 견해를 구두나 서면 혹은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제25조—(1) 군인, 경찰 및 안보 업무를 수행하는 자를 제외한 모든 개인은, 무기를 휴대하지 않는 경우 사전 허가 없이도 옥내 및 옥외 대중 집회를 개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22면 네모]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국제 사회는 그루지야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를 중단시키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가?

미국과 영국 정부는 다음과 같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가 중단되었고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학대를 당하였으며, 집회에 가지 못하게 방해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미합중국 대사관과 영국 대사관은 이러한 사태와 그루지야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진 최근의 심각한 권리 침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우리는 그루지야 정부가 이러한 사건들을 수사하고, 만인이 지닌 종교적 권리에 대한 존중심을 보장하기 위해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유럽연합-그루지야 의회 협력 위원회에 파견된 대표단의 단장인 우르술라 슐라이커는 이렇게 말하였다. “본인은 유럽 의회의 대표단을 대신하여, 최근에 언론인들과 인권 운동가들과 여호와의 증인에게 가해진 일련의 폭력적인 공격 사건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음을 알리고자 한다. ·⁠·⁠· 본인은 이러한 유형의 행위가, 인권과 기본 자유의 보호를 위한 유럽 조약의 서명국인 그루지야가 지켜야 할 기본 인권에 가해지는 난폭한 공격이라고 생각한다.”

유럽 안전 보장 협력 미국 측 위원회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공격과 관련하여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최근의 사건들을 보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그루지야의 내부 상황이 통제 불능이 되어 가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폭력을 부르짖고 있는 자들이 폭력 행위를 계속 저지르도록 부추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께서 일반 대중과 그루지야의 공직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다음과 같은 강력하고도 분명한 두 가지 메시지를 전달하기를 희망합니다. 즉, 타 종교에 대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든, 그 종교의 신자에 대하여 여하한 형태로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메시지와, 그러한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특히 이러한 수치스러운 행위를 조장하거나 이러한 행위에 실제로 가담하는 경찰관—은 법이 허용하는 최대 한도로 기소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미국의 국회 의원 일곱 명이 이 편지에 서명하였다.

유럽 안전 보장 협력 위원회의 공동 의장이자 미국의 국회 의원인 크리스토퍼 H.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루지야가 종교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겠다고 말해 놓고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 서적 소각 행위는 헬싱키 협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며, 본 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에게 나치 시절에 행해지던 서적 소각을 연상시킨다.”

인권 감시소 유럽 및 중앙 아시아 지소의 상무 이사 대리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그루지야 정부가 소수 종교 집단을 난폭하게 공격한 자들을 기소하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인권 감시소는 추가 폭력 사태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즉각적으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그러한 공격에 대해 책임이 있는 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그루지야는 국제 사회에 한 약속을 이행할 것인가? 그루지야의 국가적 평판이 기로에 서 있다.

[23면 네모]

유럽 재판소에 상소하다

2001년 6월 29일에 여호와의 증인은, 현재 그루지야의 법 집행 기관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소하였다. 며칠 뒤인 2001년 7월 2일에 유럽 재판소는 그러한 제소에 반응을 나타내었다. 재판소의 기록 담당관은, 재판부의 재판장이 이 사건에 “우선 순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편지하였다.

[18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러시아

그루지야

흑해

터키

[18면 삽화]

2001년 5월 13일–샤모얀 가족은 누군가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자신들의 집을 잃었다

[18면 삽화]

2001년 6월 17일–기오르기 바기시빌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폭도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였다

[19면 삽화]

2001년 7월 11일–다비드 살라리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공격을 받아 몽둥이로 머리를 맞았으며 등과 옆구리를 구타당하였다

[23면 삽화]

2000년 6월 28일–방화범들이 트빌리시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서적 보관소를 파괴하였다

[23면 삽화]

2000년 8월 16일–글르다니-나잘라데비 법원에서, 캐나다에서 온 증인인 워런 슈펠트는 바실리 므칼라비시빌리의 추종자로부터 공격을 당하였다

[24면 사진 자료 제공]

AP Photo/Shakh Aivazov